관악이야기

제 목 관악산 - 명칭과 연혁
작성자 유기홍의원실 작성일 2003-08-07 조 회 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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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악산 - 명칭과 연혁


한남정맥이 수원 광교산에서 북서쪽으로 갈라져 한강 남쪽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우뚝 솟아오른 산이 관악산이다.

검붉은 바위로 이루어진 관악산은 그 꼭대기가 마치 큰 바위기둥을 세워 놓은 모습으로 보여서 ‘갓 모습의 산’이란 뜻의 ‘갓뫼(간뫼)’ 또는 ‘관악(冠岳)’이라고 했다. 관악산은 옛 지도에는 ‘관악’으로 많이 나온다. 악(岳) 자체가 산(山)을 뜻하기 때문에 옛날에는 그 뒤에 다시 ‘산’자를 덧붙이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운악·북악·치악 등이 모두 그와 같은 예들이다. 이렇듯 관악의 산이름은 그 형상이 마치 관처럼 생겼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처음의 산이름은 주위 산세에서 으뜸간다는 뜻이라고 한다.

관악산은 옛날부터 개성 송악산(松岳山), 가평 화악산(華岳山), 파주 감악산(紺岳山), 포천 운악산(雲岳山)과 함께 경기도 오악(五岳)의 하나였다. 빼어난 수십개의 봉우리와 바위들이 많고, 오래 된 나무와 온갖 풀이 바위와 어울려서 철따라 변하는 산 모습이 마치 금강산과 같다 하여 ‘소금강(小金剛)’ 또는 서쪽에 있는 금강산이라 하여 ‘서금강(西金剛)’이라고도 한다.

일찍이 고려 숙종 원년(1069) 김위제가 지리도참설에 의해 남경 천도를 건의할 때 삼각산 남쪽을 오덕구(五德丘)라 말하며, 그 남쪽의 관악은 모양이 날카로와 화덕(火德)에 속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듯 관악산은 서울의 조산(朝山)으로 일찍이 역사무대에 등장했으며, 남쪽 봉우리 삼성산 중턱에 있는 삼막사에는 몽고항쟁 때 적장 살리탑을 살해한 기념으로 세웠다는 삼층석탑이 있다. 물론 관악산은 그 이전 한강을 중심으로 백제·고구려·신라 삼국이 쟁탈전을 펼치고 당군(唐軍)을 축출할 때 그 지형상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다. 서쪽 끝 봉우리에 해당하는 호암산에는 삼국시대에 쌓은 석축 산성이 있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조선후기 기록인 『연주암지(戀主庵誌)』에는 신라 문무왕 17년(677) 의상대사가 관악사와 의상대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 관악산 지도

관악산은 그 북쪽 기슭 낙성대에서 출생한 고려의 강감찬과 관련한 전설도 많이 지니고 있다. 그가 하늘의 벼락방망이를 없애려 산을 오르다 칡덩굴에 걸려 넘어져 벼락방망이 대신 이 산의 칡을 모두 뿌리째 뽑아 없앴다는 전설도 있고, 작은 체구인 강감찬이지만 몸무게가 몹시 무거워 바위를 오르는 곳마다 발자국이 깊게 패었다는 전설도 있다. 이 전설들을 뒷받침해 주듯 관악산에서는 칡덩굴을 별로 볼 수 없고, 곳곳의 바위에 아기 발자국같은 타원형 발자국들이 보인다.

관악산은 서울 경복궁의 조산 또는 외안산(外案山)이 되는데, 산봉우리의 모양이 불과 같아 풍수적으로 화산(火山)이 된다. 따라서 이 산이 바라보는 서울에 화재가 잘 난다고 믿어 그 불을 누른다는 상징적 의미로 산꼭대기에 못을 파고,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옆 양쪽에 불을 막는다는 상상의 동물인 해태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 태조는 화환(火患)을 막기 위해 무학의 말에 따라 이 산에 연주(戀主)·원각(圓覺) 두 사찰을 세웠다고 한다. 서울의 숭례문을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과 관악산을 잇는 일직선상에 위치하게 해서 관악산이 덜 보이게 한 것 등은 불기운을 막기 위한 풍수적 의미라고도 한다. 관악산의 한 봉우리인 호암산 능선에는 통일신라 때 판 것으로 추측되는 산상 우물(한우물)도 있는데, 이것도 관악산의 불기운을 누르기 위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관악산은 풍수로 보아 ‘서울 남쪽에 있는 불산(王都南方之火山)’이다. 조선이 개국되자 왕궁터를 정하는데 관악산을 정면으로 하면 궁성을 위압하여 국가가 평안치 못하다는 무학과, 남쪽에 한강이 있어 무방하다는 정도전의 주장이 양립되었다는 전설이 있으나 ‘불산’이라는 데는 같은 의견이다. 그래서 불의 산인 관악산의 불기운을 끊는다는 풍수설에 따라 숭례문(崇禮門) 바로 앞(남대문로 5가 1번지로 추정됨)에 남지(南池)라는 연못을 팠다. 연못 뿐만 아니라 서울의 모든 성문의 현판이 가로인데 반하여 숭례문은 세로로 되어 있는데, 이는 이 불의 산에서 옮겨 붙을 서울의 화재를 막기 위함이었다.

‘예(禮)’는 오행의 ‘화(火)’가 되고, 또 오방(五方)으로 보면 ‘남(南)’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崇’은 불꽃이 타오를 상형문자이기에 ‘崇禮’는 세로로 세워야 불이 타오를 수 있고, 또 타오르는 불을 막아낼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해발 629m의 연주봉은 관악의 주봉으로 이곳에 오르면 북에는 서울, 남에는 수원이 가물가물 내려다 보이고, 멀리 양주와 광주의 중첩된 산들이 그림같이 펼쳐진다. 한편으로는 서해의 낙조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워 예로부터 많은 사람이 관악을 찾았다.

흔히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될 때 조선 건국에 참여하지 않은 두문동(杜門洞) 72인 중 일부가 관악산에 은거했다는 설이 있으나 옛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태조 이성계의 신덕왕후 강씨의 오빠인 강득룡이 서견·남을진 등과 더불어 두문동 72인의 행적을 따라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다는 뜻으로 관악산에 은둔하였다. 의상대에 올라 개경을 바라보고 통곡하며 고려왕조를 생각하니 이에 의상대를 고쳐 연주대(戀主臺)라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연주’라는 이름은 두문동 인물들과 관련이 있으며, 처남·매부 사이인 강득룡과 이성계 사이에서 강득룡이 새 왕조에 두문불출하였다는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강득룡의 묘가 현재 과천 정부제2종합청사 뒤에 있다.

관악산을 찾은 대표적인 인물이 조선 태종의 큰 아들 양녕대군과 둘째아들 효령대군이다. 1418년 왕세자의 자리를 동생 충녕(忠寧 : 세종)에게 물려주고자 했던 양녕대군은 효령대군과 함께 궁궐을 나가 사흘만에 돌아왔으며, 이해 6월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이 때 두 왕자가 관악산을 찾은 것으로 보여진다. 문헌상에 효령대군이 관악산에 오른 것은 그가 33세 때인 세종 10년(1428)으로, 관악산에 올라 시를 짓고 궁궐에 있을 세종을 그리워하며 관악산 제일 높은 봉우리 바위에 ‘戀主臺’라 친히 새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효령대군은 1429년에 관악사를 중수함과 동시에 약사여래상과 미륵존상·오층석탑을 조성하였다.

조선초기 문신인 성간(成侃)은 올라 「유관악사북암기(遊冠岳寺北巖記)」를 지어 관악사에 머물며 관악의 절경을 감상하였다. 또 광해군 때 후금과의 외교관계에서 부각된 비운의 장군인 강홍립(姜弘立)은 관악산 북쪽 난곡(蘭谷: 신림동)에 은거하였으며 그 곳에 일가를 이루고 살았다.

숙종 때 그림과 문장은 물론 전서(篆書)에 있어 동방 제일인자라는 칭호를 받은 허목(許穆)은 1678년 83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관악산을 마치 신선이 노니는 것처럼 등반했다고 한다. 그의 「미수기언(眉 記言)」에 ‘서자하대(西紫霞臺)에서 영주대(靈珠臺)로 올라가 해양을 바라보다가 강산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으로 보아 연주대를 ‘영주대’로도 불렀던 것 같다. 이를 본받아 정조 때 재상을 지낸 채제공(蔡濟恭)은 67세에 관악에 올라 「유관악산기(遊冠岳山記)」를 남기고, 자신도 83세에 다시 연주대에 오를 것을 약속하기도 하였다.

또 정조·순조·헌종 3대에 걸쳐 시·서예·그림의 3절(三絶)로 유명한 신위(申緯)는 관악산 과천쪽 동남계곡인 자하동천(紫霞洞天)에 머물며 관악산 곳곳의 명승과 사적을 시·서·화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개항기 전후해서는 ?관악산유람가?라는 노래가 불려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관악산 연주대에서 서쪽으로 이어진 능선을 따라 가면 관악산의 한 봉우리인 표고 481m의 삼성산이 솟아있다. 삼성산은 관악구 신림동과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의 경계를 이루며, 그 북쪽에 뻗은 표고 412m의 장군봉과 더불어 관악산의 광역권에 포함된다.삼성산은 신라의 고승인 원효·의상·윤필의 세 대사가 산의 중턱 삼막사 부근에 초막을 짓고 수도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또 고려말에 지공·나옹·무학 등 세 고승이 이 산에서 수도하였다 하여 산이름이 삼성산이 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조선 초기에 무학대사가 중수하여 서산·사명대사 등이 수도한 도량으로 유명하며, 삼막 중에서 일막과 이막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의해 불타 없어지고 지금 삼막사만 남았다고 한다.

또 삼성산에서 북쪽 방향으로 약 2km, 30분 거리에 있는 장군봉과 그 서쪽에 347m의 봉우리가 있다. 이 봉우리의 한 바위 형태가 호랑이 모양이라 하여 호암산이라 칭하였다. 조선 건국 당시 경복궁 건설 일화와 관련하여 호랑이 모습의 괴물이 궁궐 건설을 방해하여 밤에만 나타나 건물을 무너뜨리자, 그 남쪽의 산에 있는 호랑이를 제압하고자 시흥에 있던 호암사를 산 위로 옮겨 호압사(虎壓寺)라 이름을 고치고, 산 정상에 방화(防火)의 상징인 해태를 세우고 한우물을 마련하였다는 것이다. 이 한우물은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을 앞두고 선거이(宣居怡) 부대가 진을 치고 군용음료수로 사용하였으며, 그 외곽에는 신라시대의 산성이 축조되어 있다. 그리고 이 산은 조선시대 금주(금천)의 주산이 되어 금주산 또는 금지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출처 : 관악구청 홈페이지>